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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식구, 동자석

사베짱이 이야기

by youngmanee 2011. 1. 19. 1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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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에서는 돌을 빼 놓고 문화와 역사를 이야기 할 수 없다.

외지인이 바라보는 시각으로는 절대 알 수 없는 그들간의 그 어떤 끈끈한 관계가 있다고나 할까...

 

눈을 감고 상상을 해 본다. 옛날 제주사람들은 둘(축담)로 쌓아올린 집에서 태어나 돌(울담:울타리 담장)으로 둘러쳐진 마당에서 걸음을 떼고, 일을 할 나이가 되면 돌담길로 이어진 올레길(집대문과 집밖으로 난 골목길)을 지나, 밭담으로 에워싸인 화산밭에서 일을 하고, 커다란 태풍와도 보금자리를 지켜주며, 자연의 비바람을 모두 막아주고, 돌투성이 밭에서 농사를 지으며, 고난의 세월을 같이 견디며 지내고, 마지막으로 무덤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돌(산담:봉분을 중심으로 네모지게 둘러 쌓는 돌담)로 둘러 쌓인 한줌의 흙으로 돌아가 영면을 한다. 제주 사람들은 그렇게 보면 태어나서 부터 살아가면서..그리고 죽어서 까지 화산의 돌을 단한번도 곁에서 곁에서 떨어뜨린적 없이 함께 있는 것이다. 또한 죽어서는 돌의 보호를 받는다. 산담으로 소와 말이 무덤에 들어와서 짓밟는 것을 막아주기 때문이기 떄문이다. 그리고 무덤 앞에는 작은 다양한 비석에서 부터 인석, 동자석 등의 석상들이 세워져 있다. 여기서 특히나 볼수 있는 모습이 동자석이다.


동자석은 무덤의 주인을 위해 시중을 드는 심부름꾼이자 외로움을 달래주는 벗, 영혼의 친구이기도 한단다. 동자석은 작은 것은 30센티에서 커봤자 1미터 이하란다. 온갖 풍상을 겪으며, 영원속에 살고 있는 망자와 동자들이 살고 있는 있는 곳에 죽어서도 외로움 없이 살아 달라는 조상들을 극진히 섬긴다는 제주도 사람들의 고운 심성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 아닐까 싶은데..


제주도
의 동자석은 간단한 직선과 곡선만으로  표현되어 오히려 더욱 정감이 가는 듯하다.

검은 현무암에 새겨진 갖가지 표정들, 망자의 시중을 들기 위해 생전에 좋아했던 술, 떡 등의 음식물이나 꽃, 창과 같은 상징물을 들고 서있는 모습, 웃는 표정으로 서있는 모습, 술잔에 술을 따르는 모습, 무릎을 꿇고 앉아 공부하는 모습 등 참으로 다양하며, 손에 잡고
있는 물건들도 시선을 끄며, 다산을 기원하고 번창을 상징하는 아기의 모습, 문신을 뜻하는 홀(笏:조선 시대에 벼슬아치가 임금을 만날때에 손에 쥐던 물건), 장수를 표현하는 창때위를 조각하여 후세에 덕을 기원하였다고 한다.

신앙적 믿음이 강한 제주사람들은 아이와 관련하여 아들을 잉태하기 위해여 동자석의 코를 쌂아먹기도, 역으로 유산하기 위하여 삶아먹기도 하여 제주 무덤에는 동자석의 코가 잘려나간 것을 종종 찾아 볼수 있었다고 한다. ㅋㅋ그런데 최근에 들어 돌하르방과 같이 제주문화유산에 대한 가치를 인정받아 도굴범이 늘어 공동품이 되어 인사동 골목에서 은밀이 거래 되고 있다고 하여 이에 대하여 대책이 시 내부에서 늦게나마 세우고 있다고도 한다.


제주도 돌문화공원의 뮤지엄샴에서 유난히 눈을 끌던 것이 있었다. 책욕심은 있어도, 이런 장식류에는 도통 관심이 없던 나인데, 도통 눈을 뗄수가 없었다. 한눈에 알아 내 가족이란걸 알아 버렸다.  정신을 차려보니 이아이들이 내방에 내책상 위에 자리잡게 되었다. ㅡ,.ㅡ^ . 한 아이당15,000원이면, 급하게 데리고 온거치곤 잘 데려왔다고 생각한다. ^^ 그리고, 이것도 인연일듯 싶다. 오히려, 이아이들을 치명적이게 만들어준, 조윤득 선생님께 감사 인사 드려야 할지도 모르겠다.
 아마도, 내방에서 내옆을 지켜주고 있다가 서울까지 함께하고, 앞으로의 어디든, 내가 가는 곳, 어느 공간이든 함께 할 테니 말이다. ㅎㅎ

그리고, 그리고, 팔은 안그로 굽나, 그래도 저지르고 보니 신통한것이 나의 제주도 생활을 지켜주고, 감싸주며, 나의 외로운 제주도 생활을 함께 보내줄 벗이 되어 주기도 하고 ㅎㅎ 깨알같은 밝음과 ㅋ ^^ 나중에는  기념비 적인 역할도을 해야 하니, 아마도 이 동자석이 제주도에서 데리고 가는 아름다운 추억의 유형적 모습이 되지 않을까 생각이 들었다.

비록 계획하지 않은 일이지만, 가장 잘 한 일중 하나 인듯 ^^ 오랬동안 내 옆에 있어죠 동자석아아~
오랬동안...  아주 오랬동안... 나와 함께 하였다가..  진짜 내 무덤 옆에 있어줘도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ㅎㅎ


전문적으로 더 알고 싶다면 

 

어린아이의 모습을 하고 있는 동남(童男), 동녀(童女)의 형상이다. 동자석은 동제석·동석·동주석·동제상·애기동자·자석 등으로 지역에 따라 약간 다르게 부르고 있으나 일반적으로 동자석이라고 부른다. 제주의 민묘는 부등변 사각형의 산담으로 둘러져 있고, 그 속에 동그란 봉분이 있고 묘주의 심부름꾼이라 할 수 있는 소담한 동자석이 쌍으로 마주보고 있다.

현무암으로 만들어진 동자석은 작고 귀여운 것이 특징인데 제주의 대표적인 석상으로 일컬어진다. 이 동자석은 단순미라는 현대적 미감을 갖고 있으며, 소박한 멋이 스며 있어 자연 친화적인 제주의 토착미를 대변하는 역사 미술 자료이다.

[제주적 양식으로 정착한 석물]
제주동자석에는 여러 종교가 습합되었는데 불교, 무교, 도교, 민간신앙의 요소가 반영된 것을 볼 수 있다. 사실 제주동자석은 유교 문화의 중심권에서 잉태되어 변방인 제주에까지 흘러와서 제주 지역의 독특한 풍토와 여러 신앙과 만난 결실물이라 할 수 있다.

특히 한반도동자석이 불교적인 냄새가 채 가시지 않은 채 지역마다 약간의 특징만을 남기고 있는 데 반해, 제주동자석은 분명 한반도로부터 온 입도 시조나 부임하는 제주목사, 제주 출신의 양반 토호, 유배인들에 의해 전파되었던 것을 감안하더라도 결과적으로는 제주의 풍토와 사상에 의해 재탄생한 제주적인 석상으로 만들어졌던 것이다.

조선시대 유교 문화가 제주에 유입되는 시기는 15세기이다. 이때 유교식 지방 관료들에 의해 유교식 상장제례(喪葬祭禮)가 시행되면서 지금과 같은 무덤이 만들어지게 된다. 현재 조사된 동자석 지표 조사에 의하면, 동자석은 조선 중기 이후 만들어지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시대를 세부적으로 나누어 보면, 발흥기(17세기), 융성기(18~19세기), 쇠퇴기(20세기~1970년까지), 소멸기(1970년 이후)로 구분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제주동자석은 17세기에 서서히 발흥하기 시작하여 18~19세기에 이르러 최고의 정점에 달하였고, 20세기 후반까지 그 맥을 이어오다 현재에는 한반도에서 완성되어 들어온 화강석 동자석으로 대체되고 있는 실정이다. 이 동자석들은 제주동자석이 있던 자리를 차지하였지만 자연과의 부조화 때문에 제주의 무덤을 더욱 어색하게 만드는 데 일조하고 있다.

[영혼의 벗 동자석]
동자석의 기능은 무엇일까. 무덤 앞에 세워진 동자석은 사자(死者)를 위한 예를 갖추고 여러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 사자(死者)를 위한 제례를 행하기 위한 숭배적 기능, 영혼의 심부름꾼이라는 봉양적 기능, 영혼을 지키는 수호적 기능, 가문의 권위(權威)를 알리기 위한 무덤의 치장(治裝)을 위한 장식적 기능, 사자(死者)를 달래기 위한 주술적 기능, 영혼의 벗으로서의 놀이꾼으로서의 유희적 기능 등 영혼의 벗으로서의 여러 기능을 묵묵하게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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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출처 : 디지털제주시문화대전  http://jeju.grandculture.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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